장원
가방
의정부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선옥
재개발구역을 지나는 엄마의
낡은 갈색가방은
철거라도 당한 듯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있다
이른 아침의 평화로움을
지퍼로 밀봉해놓은
가방 안에서는 반쯤 식은
합의서와 뺨 맞은 고지서가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운다
철거 말뚝의 긴 그림자만큼이나
길게 눈꺼풀을 덮는 울음에
팽팽히 당겨진 가방끈이
선고를 기다리듯 고개를 숙인다
요란한 포크레인 소리
모두의 이명처럼 떠내려가고
무너지는 것들은 저마다의 말을
엄마의 가방 속에 던져 넣었다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가방
엄마가 마른 손으로
가방의 숨구멍을 열다
자신의 슬픔과 마주치곤
기어이 울어버린다
차상
길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이희진
벚꽃이 한창인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연분홍의 벚꽃 잎이 흩날리고,
곳곳에 돗자리를 편 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 사이로 여자는 힘 없이 걷는다
여자는 몇 년 전 이곳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들리지 않고,
가끔은 이 벚꽃길의 소실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여자의 눈물방울처럼 번진 벚꽃잎들이
다시 한 번 우수수 쏟아져내린다
저 벚나무 뒤에서 아이가 웃고 있겠지.
계속 되는 착각으로 여자가 휘청거린다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칼 뒤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흐른다
벚꽃 잎들은 전부 어디로 향하는지,
여자는 길의 끝으로 흘러간다
짙은 시간들에 섞인 채,
구불구불한 길 안에서 허우적댄다
아득한 소실점의 뒤편에 있을 아이에게로 간다
차상
의자
목동고 3학년 장세희
너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서만 빛을 구하고
앞만 보며 달리는 일상에 익숙해진
나를 잠시 멈춰 세우고
너는 늘 그렇게 나를 앉힌다
그러면 발끝에서부터
나는 산뜻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시멘트 뚫고 나온 민들레의
억척스런 속삭임을 듣고,
지나가는 모르는 표정들 속에서
외로움의 온도를 나누며,
날아가는 비둘기의 펑범한 날갯짓에
괜시리 가슴이 떨린다
어느새
나는 너의 눈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시선을 두어
사소한 행복을 들추어내고 있다
차하
뿌리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김민주
햇살이 아기 뺨처럼 부드러운 날
할아버지의 손이 분주하다
한때 닥나무였던 한지
물기가 말라가자
온몸의 생장점이 허옇게 드러난다
숲속 어딘가에 두고 온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한지는
대양을 건너 온 아프리카인처럼
모진 바람이 불어도 쉬이 찢기지 않는다
저 굳은 절개가 내게도 있을까
검은 볼펜이 종이 위에 멈춰 서 있다
올곧은 문장을 써내기 위해
나이테보다 촘촘히 채워 넣던 공책과
볼펜 속 나무 진액처럼 고인 잉크
까맣게 뒤엉킨 이야기들이
좋은 시로 가지 뻗기를 기대한다
심호흡처럼 불어오는 바람
사각사각, 내 문장들이
종이 위에 뿌리 내리자
찰박찰박, 어디선가 할아버지의
한지를 헤집는 소리가 들린다
차하
안경
전북 정읍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가연
안경을 쓴 노인과 아이
아카시 길을 따라 걷는다
뒷짐 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본 노인
콧잔등까지 안경 끌어내려
햇살이 간지러논 아카시 내음
눈부처 가득 담는다
좁은 보폭으로 산 어귀를 오르는 아이
그세 뒤돌아
할부지! 할부지!
얼른 오라고 손짓한다
하얀 꽃잎이 낀 동공임에도
멀리 보는 것은 오랜 삶에서
묻어나온 지각일까
노인은 한 생 동안
멀리보는 법 하나 배워간다
아이가 내민 알사탕
멀찍이 떨어뜨려 실눈 한 번 뜨고 나면
단번에 그것이
누룽지 맛인지 박하 맛인지 알 수 있다
당장 눈앞의 꽃잎에 속아
아이, 햇발을 디뎌 떨어질지 모른다
노인으로 본다는 것은
새로운 명명법이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봄을 다독이고
노인의 눈부처 가득 아이가 웃는다
차하
버스
이우고등학교 3학년 임선우
가로등이 볼록한 뱃속으로 하나 둘
별빛들을 채워넣기 시작하는 초저녁
버릇정류장에 내려앉은 어스름을 헤집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한 사내가 있다
그에게는 사시사철이 모두 겨울인지
풀린 날씨에도 긴 소매,
주머니에 찔러넣은 왼손
작은 은신처 속에 담긴 왼손에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사라진 왼손 탓에 언제나
수많은 정류장에 걸려 넘어지시던 아버지
덜컹거리는 버스 유리창처럼 불안한
나날들을 싣고 하루하루 종착점에
가까스로 닿아왔던 것은
언제나 마지막에 서 있던 나 때문이었을까
모퉁이를 돌아 내게로 다가오는 버스
환한 불빛과 함께 아버지가 내린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등 뒤로 엉킨 울음들을 끌어안는
열아홉 살의 나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장려
길
원묵고등학교 3학년 임태훈
아프가니스탄의 밤을 씹는다
TV 속 흙길 위로 소음이 스쳐간다
펜을 굴러 찍어낸 타원의 발자국들
스스로 폭탄이 되어버린 사내의 벌린 입처럼
주변의 정적을 빨아들여
불규칙한 소음의 길을 늘어놓고 있다
볼륨을 낮추자
내레이터의 목소리와 낮게 우는 구름 소리가
탈레반 사내의 옷깃 위로 걸려 넘어진
짙은 흙먼지처럼
그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지우개를 사선으로 쥐고
공책 위로 쏟아진 흙먼지를 쓸어내기 시작한다
헤집어낸 흙먼지 속엔 항상
무엇인가 잘려나간 흔적들이
조각난 돌멩이들처럼
흉측한 입을 벌리고 있다
폭탄에 잘려나간 소년의 발목처럼
끝을 잇다만 단어들
그 위로 그려넣는 검은색 모자이크
항상 그렇듯
움켜쥔 총대의 울림이 멈추지 않듯
정적을 깨는 끌림,
펜 긋는 소리,
시를 쓰는 길
장려
의자
성보고등학교 3학년 최웅
나는 매일 감정을 쓰레기봉투에 버린다
꽉 찬 듯 보여도 다시 꽉 누르면
용수철처럼 잘 압축했다가도
금세 튀어오른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압축만 잘하는
내 승객과 달리 잘 튕기는 내 감정
햇빛이 사이드 미러에 비춰
내 눈을 긁어대기라도 하면
내 감정 한 층 압축된다
도로면과 내 엉덩이는
승객이 내게 수십 센티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듯이
유연하게 일정거리를 유지한다
도로가 평평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승객이 똑같은 건 아니다
내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과속방지턱과 달리
카드 단말기가 이상하다며
내게 감정의 과속을 요구하는 승객은 특히 위험하다
아직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큰소리가 귓가에 맴돌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매일 다니는 길처럼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 더 익숙해진다
과속방지턱을 오른다
내 감정이 낡았는지
의자에서 삐그덕 소리가 난다
장려
햇빛
서초고등학교 1학년 차민경
찰랑찰랑 나뭇잎이 환호하던 날
땅으로 나무 사이로
아스팔트길로
밀봉했던 꿈을 펼치러 왔다.
가슴에 오래 묵혀둔 꿈 하나
막 펼치려던
눈부신 날,
거리는 온통 꽃바람에 취해 웃었다.
꽃바람이 불던 날
비바람이 모질게 다졌을 어머니의 손끝 떠올라
내 꿈은
따습고 밝고 그늘까지 손길로 보듬어 주는 꿈이 되어야.
아름다운 꿈길의 동행은
어머니의 흔적
뜨겁게 눈부신 날
가슴 속에 꿈의 날개를 달면
뜨거워, 뜨거워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녹을지 몰라
이렇게 뜨거운 날에
땅의 소리를 들어보라
자드락길 뿌리까지
살 부비며 웃는 소리 들려온다
장려
의자
이매고등학교 3학년 정승혜
포개놓은 손등 위에서 하나 둘
휴게소 불빛이 중심을 지워가요
시침 끝에 짓눌린 엉덩이뼈가
조금씩 수평선을 닮아가고 있어요
화장실에 간다던 엄마가 늦네요
커피자국으로 무늬를 입힌 종이컵은
내 옆에 함께 앉은 말벗이에요
꾸준히 곁눈질을 하다 보면
외마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엄마가 손에 쥐어주고 간 종이봉투 속에서
마지막 호두과자를 꺼내 먹어요
나는 페인트 껍질이 벗겨진 자국 안으로
어느 날엔가 만화영화 속에서 보았던
비늘 뜯긴 인어를 불러와요
화장실에 간다던 엄마가 늦네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콧노래를 알려주세요
의자 주변으로 둘러져 있던
마지막 불빛 한 점이 사라지고 있어요
장려
뿌리
성문고등학교 3학년 김은지
머리에서 뿌리가 펄럭인다
흙 대신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다들 잊었는지
뿔 달린 신발로 땅을 찌르고
보도 블럭으로 짓누른다
수돗물이 얼굴에 닿으면
땅 속에 스며 들던 빗물이 생각 나
흙 냄새를 그리는데
코에 닿는 건 거품 뿐
수건이 감싸 안자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나온다
늘 땅을 향해 손 뻗고 있는데
닿나 싶으면 이불이 가로막고 있지만
더듬더듬 어루만져 본다
가늘은 목소리로 땅을 외치던 하루 위에
손을 얹고 잠든 뿌리
흙 품에 안겨 있는 꿈을 꾸고 있다
장려
안경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김진영
아버지의 안경에 거미가 집을 지었다
바닥에 한번 두었던 적이 있는데
그새 줄을 친 거 같다며
껄껄 웃는 그의 하루하루가
거미줄에 걸쳐져 있다
집 잃은 거미를 위해
먹이를 모아 두어야 한다고
큼지막한 기회를 노리는 그
번뜩이는 안경을 치켜올려
무엇이든 걸리기만을 기다린다
굽어진 허리를 두드리며
끙끙 거리는 그는
행여나 주르륵 비가 내려
집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울음 참는 연습을 한다
아버지의 하루에 맺힌 땀방울이
나를 보며 웃는다
그의 삶을 야금야금 삼키는 거미는
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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