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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단의 내일을 열어 갈 학생시인들의 시작 경연
<심사평>조 명 제
제20회 전국고교생 백일장이 5월 24일 서울 독립공원에서 열렸다. 145명의 참가 학생들이 오후 2시부터, 겨레의 독립 정신이 살아 쉼 쉬는 곳에서 즉석 시제(詩題)를 받아 시작 경연에 들어갔는데, 무궁화홀을 가득 메운 예비시인들의 열기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백일장 경연 못지 않을 터였다. 기껏 두세 시간 만에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내야 하는 경연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생들은 그간의 닦은 기량을 뽐내듯 별 망설임 없이 구상하고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손해일 이사장을 비롯한 6명의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을 논의하고, 오후 네 시경부터 심사에 들어갔다. 1차 독회의 느낌은,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보려는 학생들의 열성과 풋풋한 감성을 확인하는 한편, 작품적 수준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이만큼의 기량을 발휘한 학생들의 솜씨가 대견스럽다는 것이었다.
1차 독회 후, 우수한 평점을 받은 20여 편의 작품을 놓고, 시상의 전개와 구성력, 주제 형상력과 표현력, 그리고 시어의 적절성과 완성도 등을 기준삼아 재심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장원을 비롯한 10명의 입상자를 선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비록 고교생 대상의 백일장이라고는 하나, 시제(詩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의 깊이와 내면풍경의 형상적 표현을 기대하는 것이 행사 주최측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상의 피상적 표현, 일관성의 결여, 모호한 겉멋 부림, 주제 형상화의 미진 등이 일반적 지적 거리였지만, 상위 입상작은 시에 대한 접근방식과 형상화 내지는 ‘시적 표현’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수준작들이었다.
영예의 장원을 차지한 조용화(안양예고)의「섬」은 비유적 발상과 이미지의 창출, 탄탄한 구성력과 밀도 있는 표현력 등에서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달빛이 물결지는 판자촌 동네에/슬레이트 지붕이 떠 있다/좁은 단칸방은 아빠와 나의 바위섬/ 섬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도시에 와서도 섬지기 삶을 산다/(……)/자꾸만 가까워지는 포크레인의 갈퀴질/두려움에 떠는 나를 꼭 안으며/너 때문에 산다, 중얼대던 아빠에게/어린 나는 숨통을 틔어 주는 아가미였을까”와 같은 표현은 시에 대한 접근방식과 시적 인식의 깊이를 두루 갖추고 있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엄마는 가출해 버리고, 섬에서 나서 도시의 빈민촌에 사는 아버지의 빈궁한 상황을 설정하여 쓴 이 작품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치밀한 구성과 표현의 객관적 상관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차상 장혜욱(안양예고)의「새벽」은 장원작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한 수작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수레를 끌고 장터로 나가는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근간으로 하여, 하늘의 별이 된 할아버지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돌보고 있는 손녀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군더더기 없이 엮어 형상한 것이다. “할머니는 새벽하늘 한 겹 벗겨내어/잠든 손녀들 다독여 주고 집을 나선다”, “일찍이 샛별이 되어 버린 할아버지가/반짝, 슬프게 길을 비춘다” 같은 표현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는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다.
또 한 명의 차상 윤영찬(영동고)의「무궁화」는 무궁화를 ‘연분홍빛 치마 소녀’로 의인화하여 간결하게 전개해 간 작품이다. 신선한 분위기 속에 소녀처럼 연약한 듯이 보이는 무궁화의 곧고 굳은 내적 의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시상이 다소 단조로운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차하 3명 중 백송빈(안양예고)의「섬」은 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충격과 슬픔에 빠진 가족, 그리고 ‘함께 제사를 치렀던 이에게 제사상을 차려 주는’ 슬픔에 젖어 제사상을 차리고, ‘할아버지의 섬’을 회억하며 제사를 지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비유와 상징에 기댄 이 작품은 다소 모호한 부분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번에 무려 4명이나 입상한 안양예고 학생들의 수준은 대채로 월등한 편이었지만, 그 시풍이 같은 범주의 스타일에 묶여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하 이정우(안양예고)의「새벽」역시 비유적 상상의 발상법을 근간으로 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새벽이 되고 나서야 녹초가 되어/직장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보물지도를 가지고 보물을 찾아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해적들의 상황적 현실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차하 김수현(대원여고)의「새벽」은 새벽의 상황과 이미지를 관념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힘 있는 율격적 특장(特長)에도 불구하고 두어 군데 시간적 상황 인식의 모순이 흠결로 지적되었다.
4명의 참방 중 김성윤(정신여고)의「강」은 강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 강에 얽힌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모아 단단히 직조해 놓은 작품이다. 후반으로 가는 사이 시상 전개의 일관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미지의 수준이 다소 처지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참방의 노희화(정읍여고)의「새벽」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갯바다에 나가 맛조개를 캐는 여자[어머니]의 굽은 등을 주제로 일관성 있게 펼쳐 집중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미지의 형상력에 좀더 힘쓴다면 알찬 결실을 볼 것으로 기대된다. 참방 중 정남경(진명여고)의「무궁화」는 전반부에서 무궁화의 이미지를 절도 있게 표현하고, 후반부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시들어 가는 무궁화의 쓸쓸한 모습을 그려 나간 작품이다. 전후반 간의 시상의 균형이 흔들린 것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었다. 참방 중 정서진(진명여고)의「섬」은 섬의 황량한 무속적 풍경을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해 간 특징적 작품이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모호한 언술과, 때로 시어 선택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입상 유무를 떠나 참가 학생들의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은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었다.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를 통해 우리는 한국 고교생들의 풋풋한 감성과 생동하는 시정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시제를 선택하고 열중하여 시를 쓰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한국시단의 든든한 미래를 내다보게 되는 것이다. 칭찬과 지적 모두가 한국 시문학의 내일을 이어갈 예비시인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사랑의 언어임을 이해하고 더욱 정진하기 바라며, 참여했던 모든 학생들에게 거듭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손해일, 김용언, 조명제(글), 조성아, 이솔, 이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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